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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작가 림일`이 전한 `독재자 김정일`

'탈북작가 림일'이 전한 '독재자 김정일'
김정일은 신격화 된 북조선왕조의 독재자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19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사회안전부와 대외경제위원회에서 근무하다 1996년 쿠웨이트에 노동자로 파견돼 일하던 중 탈출해 1997년 한국에 와서 ‘소설 김정일 1,2’를 쓴 탈북작가 림일씨가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김정일 시리즈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김정일이 방문한 곳의 책임자는 특혜를 받는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하사한 객차를 단 ‘김정일의 특별열차’는 러시아에 아첨용으로도 쓰였다, 김정일은 김일성 동상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 해서 자신의 우상화에 악용했다, 김정일의 사망에 백두산의 얼음도 깨지면서 울었다, 김정일의 지시에 평양시민들이 100만명이 몰려나와서 청소를 했다, 김정일이 만든 영화를 북한인구 100배나 봤다, 김정일의 수만 달러하는 인민복은 주민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복이었다는 주장들이 탈북작가 림일씨에 의해서 나왔다.

림일씨는 “김정일이 군부대나 공장 농장 등을 시찰할 때 그가 선택해 간 곳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보좌진이 기획하고 준비한 곳만도 전부가 아니었다”며 “북한에서는 모든 군부대나 공장, 기업소들이 김정일 방문 유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 인민의 수령인 그가 현장에 와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면 그 기관과 책임자는 최고의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김정일에 접근한 곳이 권력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정일이 방문한 곳의 책임자가 승진을 비롯한 특권을 누리는 ‘행정일꾼’이 된다고 한다. 림일씨는 “현실이 이렇다 보니 ‘행정일꾼’인 공장, 농장의 간부들과 인민군 지휘관들이 맡겨진 본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김정일을 초빙하는 ‘모심사업’에 사활을 걸었다”며 전시행정의 근원이 김정일임을 주목했다.

탈북작가 림일씨는 “생전 김정일의 현지지도 경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우선 금속탐지기와 보안대를 거쳐 3시간 전에 행사장소 입장이 완료된 참석자들은 본인 기준으로 직계 4촌 안에 정치범이나 남한 연고자가 없다. 상급기관의 추천을 받아 선택된 이들은 매우 열성적인 충성분자들이다”라며 “다음 행사 장소나 노선을 3겹으로 장막을 치는데 제일 바깥선인 3선은 보안부(남한의 경찰), 2선은 국가보위부(남한의 국가정보원), 1선은 호위총국이 맡았다. 예를 들어 김정일이 평양에서 청진까지 열차로 이동했다면 그 거리 양쪽에 모두 100m 간격으로 3선 경호가 이뤄졌다. 각 지방의 공권력이 총동원됐다”라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북조선 김일성 왕조의 독재적 세습왕이었던 셈이다. 

김일일이 타고 죽었다는 ‘김정일 특별열차’에 대해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위한 국내 장거리 시찰은 물론이고 수만 km의 외국 방문까지 교통수단으로 열차 하나만 이용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열차 안에서 마친 그이니만큼 그보다 기차를 많이 탄 정상이 세상에 또 있을까. 김정일은 평생토록 출장길에 비행기 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안 보였으니 일각의 말대로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기차 마니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2001년 푸틴 초청) 당시 김정일과 동행했던 콘스탄틴 풀리콥스키는 ‘동방특급열차’라는 저서에서 그와 환담을 나누었던 열차의 일부 객차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것이며 일본에서 현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김정일이 푸틴의 호감을 사기 위해 러시아 선대 수령에 대한 예의를 갖춰 아마도 오래된 객차를 몇 개 달고 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고 주장했다.

림일씨는 “전용열차에서 그가 사용하는 칸은 회의실, 침실, 접견실, 집무실 등으로 꾸며진 몇 량이며 그것이 20량 중에 어느 부분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 최고의 방탄설비가 돼 있으며 최신형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 전용열차는 스텔스 기능을 갖춘 특수그물망, 즉 위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장치가 돼 있으며 모든 칸은 컴퓨터로 네트워크가 잘돼 있다. 회의실에는 위성전화 등 첨단 통신장비와 벽걸이 TV 등이 설치돼 있다. 접견실은 최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졌고 집무실에선 대형스크린으로 평양과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며 “전용열차 뒷부분에는 벤츠와 BMW 등 전용 리무진과 보안용 금속탐지기, 웬만한 대수술도 할 수 있는 최신형 의료장비 등이 적재돼 있다. 또한 앞부분에는 기관총과 대포까지 장착돼 있으며 전용열차가 국내에서 이동할 때는 하늘에서 공군 전투기들이 열차 상공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주장했다.

김정일 애도기간에 북한주민들이 김일성 동상 앞에통곡하는 모습에 대해 림일씨는 “평양과 지방, 각 기관과 유적지에 세워진 수천 개로 추정되는 김일성 동상에 비해 김정일 동상은 거의 없다. 물론 그것을 세운 사람은 김정일이다. 아버지이자 곧 자기였기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다”라며 “북한 주민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명동인이다. 사상과 지도력, 성품부터 인품까지 모두 똑같은 지도자로 교육받아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고 규정했다. 김정일의 현지지도 사진에 장소와 시간이 없는 이유는 “국제적인 타이밍과 시선까지 충분히 고려해 신비주의를 관전 포인트로 맞춰 홍보하려는 보좌진의 계산도 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일이 중심에 놓인현지지도 사진에 장소와 날짜와 시간이 없는 이유는 사소한 의심과 비난의 단서라도 남기지 않으려는 치밀한 의도 때문이라고 림일씨는 주장했다.

림일씨는 “(북한의) 기관과 단체에서는 순번제로 각 사람이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나와 김정일 초상화를 닦아야 하는데 이게 ‘충성의 점수’로 승진이나 진급에 효과적”이라며 “남한 학생들의 ‘자원봉사 점수’가 대학 진학 때 유리한 것과 비슷하다. 미지의 세계, 북한에서는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주민들은 당연히 방 안에 걸린 김정일의 초상화를 가장 먼저 꺼내온다. 생명을 위협하는 화염 속에서 자기 몸에 치료 불능의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말이다”라며 김정일 우상화가 깊어져 있음을 증언했다. 림일씨는 “잿더미가 된 화재 현장에서 김정일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죽었다면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청소년의 교육용 교과서에 실리는 훌륭한 귀감(모델)이 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초상화가 어린 학생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취급받는 신화시대에 북조선은 머물고 있다는 증언이다.

김정일의 ‘명령’에 대해 림일씨는 “조선노동당의 방침은 곧 김정일의 지시다. 법과 국가 위에 있는 노동당이기에 그의 지시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지상의 명령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반대도 있을 수 없다. 2000만 인민이 절대적으로 따른다”며 “북한의 모든 기관과 단체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은 물론이고 각 부서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노동당, 즉 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집행한다. 예를 들어 모 건설회사에서 올린 사업계획에는 언제까지, 어디에, 어떤 형태로, 몇 채 주택을 짓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준공 시기는 주로 김일성 김정일 생일을 포함한 국가적 명절에 맞춘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다 보니 부실공사가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김정일 결재하에 이뤄진 1980년대 이후 시행된 북한의 건설은 대부분 부실공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지방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면서) 시내가 어지럽습니다. 청소 좀 하시오”라고 하자, 한 시간 뒤 100만 평양시민이 물통과 걸레를 들고 나와 방을 청소하듯 도로와 건물을 닦으며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으니 인민이 된 도리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림일씨는 증언했다. 1980년대 후반 언젠가 현지지도 길에서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을 본 그가 “우리 미풍양속으로 봐도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지”라고 하자 다음 날로 여성들의 바지 착용이 중단됐다고 림일씨는 증언하기도 했다. 림일씨는 “김정일의 결재 종류에는 친필지시, 지시, 방침 등이 있다. 친필지시는 최고 등급으로 정치 외교 대남 부문에, 지시와 방침은 중간과 보통급으로 국내 모든 부문에 내려졌다. 최측근은 친필지시, 간부는 지시, 인민은 방침으로 통치했다”며 법 위에 군림한 왕으로서의 김정일을 전했다.

1920년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투쟁을 미화한 내용으로 1980년부터 제작한 10부작 혁명영화 ‘조선의 별’로써 김일성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 김정일은 영화광이 되었다고 림일씨는 증언했다. 림일씨는 “체제 선전을 기막히게 잘하는 북한 주장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총관객은 2억5000만 명, 2000만 인민이 10회 이상 관람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세계적인 정치학습의 나라인 북한에서 2000만 인민이 평생토록 하는 김정일 사상 학습과 마찬가지로 혁명영화 관람도 의무다”라고 주장했다. 림일씨는 “옛 소련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북한 영화는 외국 축전에 내놓을 만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1978년 1월과 7월 남한의 유명 영화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영화감독을 홍콩에서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은희 신상옥씨는 자유를 찾아 탈북했다.

“노동당 경내에 있는 영화문헌청사는 김정일 전용영화관이었다. 수만 개의 외국 영화필름을 그대로 혹은 CD로 보관하고 있다. 영화 제작에 든 비용이나 장소까지 정확히 기록해 영구 보존한다. 할리우드영화는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찾기 어려운 필름이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고 증언한 림일씨는 “영화를 본 그가 ‘잘 봤다’고 하면 그 필름은 특수금고에 따로 보관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도 그가 ‘별로다’ 하면 즉시 휴지통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림일씨는 “어떤 이유든 생전의 김정일은 영화적인 인물이었다. 12만여 km²(북한 면적)의 거대한 세트장에 2000만 인민 엑스트라와 수많은 유명 감독(300만 절대충성분자)들이 있었다. 20대에 가졌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국 통치자의 꿈을 영화로 인해 영화처럼 이룬 김정일은 영화 덕에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희화화 했다.

김정일의 인민복에 대해 림일씨는 “성인이 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옷만 입고 다닌 그의 잠바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일 동지의 잠바 차림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위대한 장군님의 형상을 매우 잘 표현한다’고 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200여 개 나라 정상 중에 오로지 잠바를 입었던 사람은 그가 유일하니 어쩌면 이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입은 것도 모자라 저세상에도 입고 갔으니 말이다”라며 “특수 주문한 이탈리아 고급 원단으로 만든, 한 벌에 수만 달러 하는 잠바를 입었던 김정일이 과연 대다수 인민이 멀건 죽으로 연명하며 힘들게 사는 것을 알기나 했을까. 전혀 몰랐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림일씨는 “지금 김정은도 인민복을 입고 있다”고 말하면서, 김일성 일족의 인민족 사기극을 암시했다.

“당과 국가 간부들이 김정일 장군님께 ‘일을 좀 쉬면서, 건강도 살피면서 하십시오. 장군님께서 건강하셔야 우리 조국이 융성 번영합니다. 인민의 간절한 염원입니다’라는 건의를 수도 없이 올렸다. 그럴 때마다 그이께서는 ‘내가 쉬면 우리 인민들이 힘듭니다. 나도 수령님의 혁명전사로 단 하루도 쉴 수 없습니다. 하루 3시간 쪽잠을 자며 일을 해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잠바를 입습니다’라고 하시였다”며 “이토록 검소하시고 자애로우신 김정일 장군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 인민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로 우리는 이 영광, 이 행복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 또한 대를 이어 그이께 충성하는 것이 공민의 첫째가는 의무로 간직하여야 한다”는 평양 노동당 강연을 림일씨는 전했다. 김정일의 인민복은 대주민 기만용이었다는 주장이다.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hursuaby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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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12/26 [09:45] 최종편집: ⓒ 올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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