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아래 글의 출처는 월간 '경제풍월'입니다.
안전행정부가 내년부터 도로명주소를 전면 시행할 예정이나 대다수 국민들은 왜 그런 정책을 추진하는지 의아해한다. 요즘 길거리나 전봇대에 부착된 생소한 도로명주소 때문에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등산로에 붙어있는 새로 바뀐 길이름 때문에 산길을 헤맨 적이 있다. 하산 길을 찾았을 때는 점심때가 한참 지났었다. 산 아래 식당에 들렸더니 나처럼 골탕 먹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늦은 점심을 들면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지척에 목적지를 두고 이리저리 헤맨 일을 생각하니 새삼 울화통이 치밀어 서로가 구면처럼 불만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지역민심, 주민의견 무시 말살
유적답사 때도 새 길이름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짜증나는 답사 길이 되고 만다. 나이든 사람들은 새로 바뀐 길이름에 언제 적응하여 불편 없이 나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다.
불교계에서는 ‘불교로 유래된 지명말살 정책’이라며 반발하고 부당성을 지적한다. 불교계 반대가 아니라도 국토의 땅이름과 길이름을 이런 식으로 바꿔서는 안된다.
‘해오름길’, ‘통일로’ 등은 얼핏 듣기로는 좋아 보이겠지만 그곳 땅이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길에서만 해가 떠오르고 그 길만이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말인가.
좁다란 등산로에 통일로 1길, 2길, 3길이라는 도로명이 왜 필요한가.
10여 년 전에도 교통과 우편배달 편의를 위해 동네이름 변경작업을 위해 주민들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주민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어떤 지명위원은 주민들 의견을 싹 무시하고 모두 예쁜 한글이름으로 개명했노라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지명위원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도로명주소로 보면 도로의 개념도 이상하게 여겨진다. 8차선 길은 대로(大路), 4차선 길은 로(路), 2차선은 그냥 길이라고 구분했다. 우리말의 길은 좁은 길이고 넓은 길은 한자어로 대로(大路)이다. 도로명주소가 우리말을 천시하는 꼴이다.
3국시대 마을, 옛 정취 숨 쉬는 곳
주소를 고칠 때는 우선 현재의 땅이름을 검토해 봐야한다. 지역의 역사와 유래, 지세, 형세, 기후풍토, 지질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것이 현재의 동네이름이다. 그러므로 먼저 원주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땅이름의 역사는 그 뿌리가 유구하다.
예를 들면 주(州)는 목사가 근무한 곳이거나 왕비가 배출된 곳이다. 양주, 성주, 나주 등은 목사가 있는 고을, 여주, 파주는 왕비가 나온 고을이다.
‘서라벌’(경주), ‘달구벌’(대구), ‘비사벌’(창녕) 등의 ‘벌’은 신라의 고을이름, ‘미추홀(물고을-인천)’ ‘메홀’(물골-수원) ‘달홀’(양양) ‘마홀’(파주)의 ‘홀’은 고구려의 고을이름, ‘온달부리’(전주) ‘모랑부리’(부안), ‘고랑부리’(고창) ‘소부리’(부여) 등의 ‘부리’는 백제의 고을이름이다.
‘양원’ ‘퇴계원’ ‘사리원’ ‘인덕원’ 등의 ‘원’은 쉬어가는 숙소와 주막이 있는 곳이다. 또 ‘한참 가야한다’는 ‘참’은 역과 역 사이의 간이 휴게소가 있던 곳이다. 이렇게 고을마다, 마을마다 오랜 역사와 삶의 문화가 축적되어 있다.
역사적 유래와 마을마다 문화유산
‘선비마을’, ‘정승골’, ‘비석골’, ‘효자동’ 등도 각기 역사적인 유래를 안고 있다. ‘삽다리’, ‘양산다리’, ‘너덜이’, ‘놀뫼’, ‘노루목’, ‘구리골’ 등은 땅의 용도, 특징, 지질 등을 나타낸 이름이다.
‘삽다리’는 솔가지 등을 엮어 만든 외나무다리가 있던 곳, ‘양산다리’는 두 산을 이은 다리를 상징하는 뜻이 담겨있다. ‘너덜리’는 널빤지로 만든 다리로 ‘넓은들’의 뜻, ‘ 놀뫼’는 나지막한 산들이 연이어 늘어선 지형을 뜻한다.
‘말죽거리’, ‘마장동’, ‘구파발’, ‘역삼동’, ‘역촌동’ 등은 파발마가 있던 곳으로 요즘의 버스터미널이 있던 곳 지명이다. ‘비상리’, ‘비하리’는 그 지역의 풍향과 관계있는 땅이름이고 ‘무너미’(수유리)는 눈으로는 높은 지역인데 물이 흘러 넘어가는 지형의 특징을 나타낸다.
‘온정리’, ‘초정리’는 온천이나 약수가 나오는 고을, ‘약수동’, ‘옥수동’은 궁중의 전용 우물이 있는 곳이다.
성씨의 본관도 창녕성씨, 함안조씨, 고성이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 모두 땅이름에 근원을 두고 있다. 외국지명에는 이 같은 역사와 문화를 담은 이름들이 많지 않다. 역사 200년의 미국은 원래 땅이름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다르다.
‘월가 몇 번지’는 우리 정서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주소체계를 서구화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 문화유산의 등재가치가 있는 우리의 고유 땅이름을 묻고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외국의 주소체계를 따라가야 하는가. 선진화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밀어붙이기식 행정 설득력 없다
정부의 새도로명 정책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혼동되는 번지수와 불편한 주소체계의 개선을 통한 행정 편의성을 생각한 사업일 것이다. 또 지역주민들이 바꿔달라고 요구한 경우도 더러 있을 것이다.
방구리, 유방리, 월경리, 공알리, 조부리, 구라리 등 부르기에 민망한 땅이름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 개선할 일이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도로명주소 변경은 분명 잘못되어 가고 있다.
새주소에는 마을이름이 없어졌다.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경춘로 884-1로의 경우 도로번지 뿐이다. 마을이름이 사라지고 집만 도로가에 덩그렇게 앉아있는 꼴이다. 도로명 주소체계는 우리문화를 없애는 매국행위라는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새주소체계에 이미 3,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어 바꾸기에는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주장은 밀어붙이기식 행정으로 설득력이 없다. 행정편의주의 정책은 이런 문제를 간과하고 정책을 만든 이가 책임지고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이미 투입한 예산을 이유로 민족문화가 말살되어서는 안된다.
우편집배원도 도로명주소 아래 동명을 다시 적어 배달하는 실정이다.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사업을 누구를 위해 추진하는가.
땅이름은 살아있는 문화의 화석
이름이란 땅이름이든 사람이름이든 강아지 이름이든 남이 불러줘야 생명력을 갖는다. 땅이름을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도로명주소체계에서는 이미 동명이 법적으로 폐기됐다고 한다. 올해 태어나는 아이들이 30~40세가 되면 지금의 동네이름을 기억할리 만무하다.
요즘 운전자들은 네비게이션이 보급되어 주소와 번지를 입력하면 산꼭대기라도 목적지를 찾아 데려다 주는 시대다. 우체국의 우편배달도 불편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전국토를 일제가 창씨개명하듯 생뚱맞게 모조리 갈아 치우는 방식으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
유물이 땅속에 묻혀있는 ‘역사의 화석’ 이라면 땅이름은 지역의 역사를 간직한 살아있는 문화의 화석이다. 지금이라도 길이름(도로명) 위주의 주소변경사업은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의 국력신장이나 한류열풍으로 보면 오히려 우리말 땅이름을 더욱 발굴하여 가꿔나가야 할 때이다.
글/반재원(한국땅이름학회장, 훈민정음연구소장, 국학박사)
[ 2014-01-03, 13:35 ] 조회수 : 826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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