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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몰려오고 미국은 비켜서고

북한은 몰려오고 미국은 비켜서고

2005/09/26

[김대중칼럼]북한은 몰려오고 미국은 비켜서고

김대중 · 고문

입력 : 2005.09.25 21:19 31' / 수정 : 2005.09.25 22:29 08'



노무현 정권의 후반에 접어든 2005년 후반.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중대한 변환(變換)의 시기를 맞고 있다. 변환의 한 줄기는 남·북한 관계이고 다른 한 줄기는 미국과의 관계이다. 노 정권이 북한 김정일 정권에 접근하는 속도는 대단히 빨라지고 있고, 북한은 이런 상황을 최대로 활용해 한국 내 좌파의 지상화(地上化)를 도모하고 있다. 그 다른 쪽에서는 지난 60년간 이 땅의 알파와 오메가로 여겨졌던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발을 빼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김정일 세력은 지금이 한국 내에 팽창하고 있는 ‘감상적 민족주의’를 적극 이용하는 최적의 시기라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김 정권은 근자에 남쪽 노 정권의 집요한 대북 접근 노력을 새삼 재평가해 노 정권과의 교섭을 활성화해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남한 내에서 친북(親北) 세력들이 공개적이고 공격적으로 활동하도록 주도하는 적극 공세로 돌아섰다. 북측은 남측이 제공할 수 있는 경제·관광·스포츠·영농 등 각종 지원을 최대한 얻어내는 한편 맥아더 동상 철거, ‘통일전쟁’의 공론화, 반미(反美)운동의 노골화 등을 밀고 나오고 있다.


심지어 노동신문 논설을 통해 ‘미국의 전쟁 머슴인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북·남 대결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라며 핵전쟁 위협까지 거론했다. 차기 정권의 향배를 겨냥한 ‘북풍(北風)’이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정치와 안보 등 주요 분야에 북한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노 정권은 국민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10조원이 훨씬 넘는 돈을 김정일 정권에 쏟아붓기로 작정했다.


남·북한 정권의 급속한 접근은 대미관계의 축소를 그 대가로 삼고 있다. 미국의 부시 정권은 이번 4차 6자회담을 전후해 한·미관계의 ‘그 이후’를 모색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가 있다. 미국은 이제 북핵문제에 지쳐 가고 있다. 6자회담 결과를 놓고 한국도 ‘외교적 승리’, 중국도 ‘외교적 승리’를 자찬하고 러시아도 ‘잘된 회담’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곧 미국의 ‘외교적 패배’가 된다. 이번 공동 합의문 수준이라면 미국이 지금까지 버텨 올 이유가 없다. 어느 전직 주미대사는 “북한이 끝내 핵 무장으로 가면 일본의 핵 무장을 막을 수 없고, 중국은 곤란한 처지가 되며,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외에는 갈 곳이 없게 될 것”이라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럴 바에는 북핵이 제 갈 길을 가도록 손을 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근자에 ‘한·미동맹의 미래’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달 말께 열리는 한·미 안보정책구상회의(SPI)와 10월 한·미 국방장관회담의 주의제가 ‘한·미동맹의 미래’로 잡혀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뉴욕의 한·미·일 3개국 회의와 맨스월드 콘퍼런스의 주제도 공교롭게도 한·미동맹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돼 있다. 주한미군의 재배치문제가 반미운동과 미군 철수 요구 등 장애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미군 철수, 더 나아가 한·미 안보관계의 하향(下向) 설정 등을 서서히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이 한국과의 안보관계를 현 상태로 끌고 가는 것에 한계가 온 것으로 보고 한·미 안보관계를 재조정하는 첫 움직임으로 한반도의 휴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이행하는 순서를 밟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북한 당국뿐 아니라 한국의 노 정권과 친북 세력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것임을 미국측은 굳이 숨기지 않고 있다.


다만 미국측은 이런 한·미관계의 전환, ‘북핵’의 방치, 북한의 대미 직거래 요구, 미군 재배치문제 등을 한국의 ‘국내 정치 변수’를 염두에 두고 시간을 가지고 검토할 것이다(외교안보연구원 김성한 교수). 이 관측은 미국이 그 모든 것의 최종적 결정은 한국의 다음 정권 때까지 기다릴 것으로 보면서 ‘냉소적 방관주의’ 자세를 견지할 것이라는 견해와 상통한다(성균관대 김태효 교수). 한 소식통은 이번 6자회담에서 미국의 ‘양보’에는 “이번에 또 결렬되면 그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한국과 중국 등의 은근한 압력도 작용했지만 이 결과가 ‘제2의 촛불’이 되어 한국의 다음 선거에 이용(?)되는 3년 전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도 미국이 ‘방관자’의 위치로 내려앉은 이유라고 설명했다.